카와리사키 유이토 → 후토리 후유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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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래 파고든 습관을 깨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사람은 대부분 익숙한 일을 하려고 하고, 변화보단 유지를 택한다. 그러니 가령 유이토가 가볍게 사람을 대하고, 노을을 보며 호흡을 더듬고, 잠들기 전엔 빛바랜 야광별을 쳐다보는 일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면서도 가장 변하고 싶었던 건 단연 본인이었다. 후유엔과의 반복되는 통화 또한, 숨 막힌 삶에서도 무엇이라도 자신을 구해줄 것이라고 믿고 붙잡던 것이 시작이었을 것이다. 초봄의 서늘한 바람이 머리칼을 스쳐 지나가면, 집 앞에서 걸음을 멈춘 채로 달을 보며 한 차례의 숨을 토해내었다. 유이토는 이윽고 문을 열었다.


"다녀왔습니다-."



  그에게는 오늘의 마지막 일정이 남아있기에 문을 열기까지의 망설임은 단 한 번뿐이었다. 유이토가 늦은 산책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 바라본 시계는 10시 2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2020.03.26.
[PM 10:23 수신 통화 (02:34:19)]

여보세요~ 후유엔, 뭐해? 또 디저트야? 되게 좋아하는구나-. 다른 건 안 하고 있었어? 흐음~, 새삼스럽지만 너 달달한 걸 좋아하는 거에 비해 많이 안 찌는 편인 거 같아. 만약 먹는 만큼 찌는 편이었어도 계속 먹었을 거 같아? ···이정도 조건이어야 운동을 한다니···. ···자전거? 최근에 배우고 있는 거 같던데 누가 가르쳐주고 있는 거야? 하하, 히데오는 튼튼하니까 세 번까지는 부딪혀도 멀쩡할 걸~? 기왕 좋은 선생님이 가르쳐줄 때 잘 배워놔. 그래야 나중에 나랑 놀러 가서 자전거 타지··· ··· ··· 

2020.04.22.
[PM 11:32 발신 통화 (02:58:33)

여보세요···? 정말 네가 먼저 건 거야···? 우와··· 난 전혀 상상도 못해봤는 걸. 이런 것도 좋네. 전화 버튼 누르기까지 내 생각 얼마나 했어? 뭐? 아하하하! 2시간이나? 솔직히 말해봐, 지금도 엄청 긴장했지? 원래 먼저 연락 자주 하는 편이야? 그래~? 그럼 무슨 할 얘기 있어서 전화한 건가? ···뭐야, 정말 그냥 전화해준 거였구나. 내 목소리가 조금 감미롭긴 하지. 그래도 마침 잘 됐어. 나도 네 목소리가 듣고 싶던 참이거든. 지금 뭐 하고 있어? 너무 일찍 누운 거 아냐? 나 기분 좋아서 오늘 안 끊어줄 건데··· ··· ···

2020.07.01.
[PM 10:32 수신 통화 (03:34:42)]

여보세요, 후유엔. 자고 있었어? 목소리가 좀 가라앉은 거 같은데-. 어제? 왜? 무슨 일 있었어? 아하, 하긴 통화하느라 공부를 많이 못 하긴 했지. 그나저나 의외다. 공부도 하는구나. 나는 네가 그냥 수업을 잘 듣고 잘하는 줄 알았지. 내 앞에선 공부하는 모습 보여준 적 없잖아. ···혹시 지금 내가 너 공부하는 거 방해한 건가. 허~? 너무 단칼에 대답하는 거 아니야? 좀 봐줘, 좋아서 그런 거니까. 있지, 내일 마지막 시험이니까 끝나고 놀래? 시간 괜찮아? 가보고 싶은 가게 있으면 가봐도 좋고. 와! 그럼 내일 마치고 너희 반 갈게. 선약 있을까 봐 걱정했는데 다행이다. 그럴까? 으음.. 사실 나도 너랑 가고 싶어서 봐둔 곳 있는데. 정말? 다음에 가자고 하려고 했는데 둘 다 가는 걸로 하자. 늦으면 또 너희 집에서 자고 갈까··· ··· ···

2020.10.12.
[PM 10:27 발신 통화 (03:48:11)]

···그랬구나. 근데 집에 누구 왔어~? 다른 사람 목소리 들리는데-. 아, 그래도 통화해도 괜찮은 거야? 그래? 집에 무슨 일 있는 건 아니지? 네가 말해주지 않으면 내가 접하는 건 신문이 다 인 거 알잖아. 그렇다면 다행인데··· 무슨 일 있으면 꼭 말해줘, 후유엔. 내가 네 생각 많이 하는 거 알잖아. 알았어. 피아노? 아예 시작부터? 이번에도 혹시 다른 친구한테 배우는 거야?··· ··· ···

2020.11.20.
[PM 10:28 수신 통화 (03:51:07)]

여보세요~ ······후유엔. 울었어···? 왜? 뭐 때문에? 무슨 일이야? 혹시 다친 건 아니지? 지금 나갈까? 영화? 무슨 영화? 아~, 이터널 선샤인 재밌지. 근데 그거 멜로 영화잖아. 로맨스 장르는 잘 안 보지 않았어~? 그렇구나. 재밌었어? 나 그 영화 3번이나 봤거든. 신기하잖아, 결국엔 모든 것을 잊어도 다시 사랑을 하게 된다는 점이 이해는 안 되지만 부럽고 좋아서 계속 다시 봤었어. 평소에도 영화 보면서 잘 우는 편이야? 일부러 눈물 나는 것만 찾아보는 편? 아하하, 농담이야. 뭐, 울고 나면 후련하니까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하지만 말이야. 말 나온 김에 우리 수요일에 영화 보러 갈래? 지난번에 영화 본 곳으로 갈까. 기왕이면 가까운 곳이 좋잖아. 수요일에 개봉한다는 로맨스 영화 알아? 응, 기왕이면 개봉일이 기분 좋잖아. ···보고 너 지난번에 좋아하던 케이크 집도 가자. 그럼 돌아가는 길에 야식도 사 오고··· ··· ···

2020.12.28.
[PM 11:21 발신 통화 (03:04:51)]

··· ··· ···목소리가 좀 떨리는 거 같은데 감기야? 이 한 겨울밤에 환기라니··· 필요하긴 하지만 조심해. 그··· 너희 집 파파라치 같은 것도 많이 붙었었잖아. 너도 참 고생이다. 다들 남의 집 사정에 왜 그렇게 관심이 많은 거래? ···지금 뭐 마시고 있어? 응, 그럴 거 같아. 네가 고른 거라면 당연하지. 내년이 되기 전에 마셔볼 수 있으면 좋겠네. 문은 슬슬 닫는 게 어때? 좋아. 그런데 너무 늦게 건 거 아냐~? 벌써 12시야. 조금 더 일찍 전화하지. 나 기다리고 있었는데-. 진짜야. 오늘은 일이 있어서 먼저 연락 못 한 것뿐이라니까? 아니, 마침 딱 끝났으니까 완벽한 타이밍이었어. 그리고 일이 있더라도 네 전화라면 받아야지. 안 받으면 혼자 또 의기소침해하고 있을 게 뻔하잖아. 내가 너를 아는데 어떻게 그러겠어··· ··· ··· 

2021.03.24. 수요일
[PM 10:32 수신 통화 (03:29:55)]

아하하, 즐거웠나 보네. 그래? 시라유키는 항상 웃는 얼굴로 속속들이 꿰고 있단 말이지···. 다음에는 나랑도 가자. 후유엔, 지금 졸리지. 목소리가 엄청 늘어지는 걸. 오늘은 이만 끊고 잠에 드는 게 어때? 흠, 내일 볼 텐데도? 내가 졸업하고 나면 나랑 연 끊을 거야···? 그런 건 아니잖아. 앞으로도 연락할 거고, 만날 거면서 너무 아쉬워하지 마. 난 네가 나랑 같이 졸업하길 바라긴 했어. 하지만 늦은 거 알지? 그리고 2학년에 좋은 친구들도 많잖아. ···너무 슬퍼하지 말자. 영원한 이별은 아니잖아··· ··· ··· ··· ··· ··· ··· ··· ··· 후유엔~ 자는 거야? 통화 상대를 두고 자버리면 서운한데······. ···잘 자, 내일 보자.

  유이토는 침대에 몸을 뉘이고 통화가 끊긴 핸드폰 화면을 한참이나 들여다보다가 갤러리를 들어갔다. 골든벨을 한 날, 작은 종이에 머리를 맞대고 서로를 찾던 날, 비가 와서 쫄딱 젖은 친구들을 말려주던 날, 다 함께 마츠리를 간 날, 스티커를 주고받으며 소원지를 쓰던 날, 츠바페 속에서 학교가 떠나가라 웃던 날까지. 그 사진들 속의 후유엔도, 유이토도, 다른 친구들도. 항상 즐거워 보여서 내일이면 이 모든 것에 대한 온점을 찍게 된다는 사실이 사뭇 아쉽게 느껴져 왔다. 가벼운 인간관계 속 우연히 쌓여간 무게는 버겁기보단 유이토를 그 자리에 서 있을 수 있게 만들어주었다. 어디에도 제대로 속하지 못한 채로 이곳저곳을 부유하며 세상을 삐뚜름히 보던 자신을 땅에 붙들어준 이 관계들에 유이토는 애정을 느꼈다.

  핸드폰을 내려놓고 천장을 바라보면, 수없이 세던 천장 무늬들 그리고 그 옆에 작게 붙여진 야광별 하나가 시야에 들어왔다. 어릴 적 남몰래 붙여둔, 홀로 잠들 때마다 외로움을 달래던 그의 유일한 빛이었다. 더이상 야광별은 빛을 밝히지 않았지만 자라버린 유이토의 마음에는 다른 것이 반짝이기 시작했다. '후토리 후유엔', 그가 유이토에게 새로 자리 잡은 별이었다. 떼지 못한 별을 잠들기 전까지 바라보던 습관은 또 다른 습관으로 인해 사라진다. 유이토는 이제 바래버린 것을 좇지 않는다. 마지막까지 그를 떠올리다 조용히 눈을 감는다. 오늘이 지나버리면 많은 것들이 변화하고 끝이 나겠지만, 외롭지 않은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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똑같은 무늬가 하나, 둘, 셋….

침대에 풀썩 누운 상태로 천장에 수놓아진 무늬들을 바라보며, 하나둘 그 개수를 세고 있는 유이토의 낯빛에는 평소에 쉽게 보이지 않던 외로움과 쓸쓸함이 비쳤다. 평소보다 가늘게 떠진 눈에 웃음기 하나 없는 표정으로 묵묵히 천장 무늬의 개수를 세고 있는 그의 표정을 본다면, 아마 평소에 그를 알던 사람들은 그가 자신이 알던 유이토가 맞는지에 대해 의아해할 것이 분명했다.

그가 천장의 무늬를 열다섯까지 셌을 때, 그 옆에 작게 붙여진 야광별 하나가 시야에 들어왔다. 그것은 어릴 적 유이토가 남몰래 붙여둔 것으로, 홀로 잠들 때마다 외로움을 달래던 그의 유일한 빛이었다. 더이상 야광별은 빛을 밝히지 않으나, 유이토는 아직도 그 별을 떼지 못하고 늘 잠들기 전 그 위치를 확인하게 되는 습관이 있다.

야광별을 바라보며 멍하니 생각에 잠겨 든 유이토의 눈에는 여전히 쓸쓸함이 여렸다. 그의 머릿속으로 어린 시절에 관한 생각이 파도처럼 몰아쳤다. ‘유이토, 그러면 안 되지.’, ‘너는 도대체 애가…’ 그는 순간적으로,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 사람들 사이에 잔뜩 겁에 질린 어린 시절의 자신이 떠올랐다. 단지 태어난 것부터가 모든 잘못의 시작이라는 듯, 그들은 앞다투어 어린 유이토의 앞에서 목청을 높이기 시작했다.

유이토는 떠오른 생각들을 잠재우고자 눈을 질끈 감았다. 그는 어떻게 해서든 지금 이 생각에서 벗어나야만 했다.

“생각하지 마, 생각하지 마.”

유이토는 자신에게 암시를 걸듯이 중얼거리며, 몸을 옆으로 돌려 누웠다. 포근한 이불자락이 흔들리는 소리가 그의 귓가에 맴돌았다. 그는 하얗게 펼쳐진 이불을 손등으로 쓰다듬으며 그 보드라움을 느꼈다. 어릴 적의 그도 이와 같은 포근함과 보드라움을 늘 갈망했으나, 지금의 이 느낌과는 사뭇 달랐다.

“심심해. 할 것도 없고…. 친구들 보고 싶다.”

그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누군가에게 연락해볼까 생각을 하게 되었다. 하나둘 얼굴과 이름을 떠올리며 생각을 곱씹던 유이토의 눈이 스르륵 감기게 되었다. 평소의 유이토는 보이는 모습에서도 그러하듯, 섬세한 태도에 항상 미소가 감돌았고, 보는 이들로 하여금 아름답다는 칭찬이 절로 튀어나오게 하는 능력이 있었다. 어딘지 속내를 알 수 없는 눈빛은, 설령 거짓임을 알면서도 그의 말을 오롯이 믿고 싶게 만들었고, 그 모든 것을 이미 눈치챈 것 같은 유이토의 말아 올려진 입꼬리에 감기고 싶게 만들었다. 이 모든 것은 그가 지닌 습관이자, 점차 성숙해져 가며 얻어낸 어떤 결과물이었다. 그가 이와 같은 자신의 모습을 얻기 위해 얼마나 노력해왔는지는 그의 주변 누구도 알지 못할 것이다.

속내가 어떤지 알 수 없던 평소 유이토의 표정과 달리, 지금 까무룩 잠이 든 그의 표정은 어릴 적 그가 보이던 순수한 모습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다. 생각이 곧 표정에 스칠 정도로 순수했던 당시의 자신 모습 그대로….

……

고즈넉한 저녁이었다. 뉘엿뉘엿 저물어가는 해는 세상에 어떤 아쉬움이라도 남아있는 듯이 좀처럼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고, 그건 어린 유이토 역시 마찬가지였다. 노을이 지는 풍경을 마주 보며, 유이토는 소리 없이 흘러가는 시계와 자신 앞에 놓인 식어가는 음식들을 차례로 바라보았다. 그의 옆에서 심술 궂은 표정의 하녀장이 헛기침을 몇 번 하자, 깜짝 놀란 유이토가 부랴부랴 왼손으로 식기를 들고 음식을 집었다.

그 순간, 하녀장이 그의 손등을 찰싹- 내리쳤다. 적막 속에서 짧고 강한 소리가 몇 번이나 울렸고, 깜짝 놀란 유이토가 왼손의 식기를 놓쳤다. 짤그랑 소리가 다시 메아리처럼 퍼지자 유이토는 흘끔, 하녀장을 올려다보았다. 하녀장은 잔뜩 날카로운 표정으로 유이토를 쏘아보고 있었다.

“도련님, 왼손이 아닌 오른손이라고 제가 몇 번이나 얘기 드렸죠? 왜 항상 왼손으로 식기를 든 채 음식을 집으려고 하시나요? 계속 이러시면 저도 두 분께 말씀드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해드릴까요?!”

어린 유이토는 자신에게 쏘아붙이듯 말하는 하녀장을 바라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 오른손으로 식기를 바꿔 들어 어눌한 젓가락질로 음식을 집기 시작했다. 음식을 입에 넣고 오물오물 씹는 순간까지도 그는 자신이 음식을 몇 번씩 씹고 삼켜야 하는지를 일일이 세어야만 했다. 하나를 겨우 입에 넣어 씹고 삼킨 뒤, 그는 자신이 움직이지 않으면 아무 소리도 나지 않는 고요한 식탁을 바라보았다. 자신을 보는 눈이 이리도 많음에도 불구하고, 유이토는 몸이 움츠러들 만큼 외로웠다. 그는 자신의 맞은편 의자들을 바라보며, 언제든 자신이 왼손으로 음식을 집을 시 자신의 손등을 때려줄 준비가 되어있는 하녀장에게 말을 걸었다.

“있지, 엄마·아빠는 언제 돌아와? 나 매일 혼자 밥 먹는 거 싫은데….”

유이토의 투정 어린 말투에도, 하녀장의 시선은 유이토의 옷매무새에 집중되어 있었다. 그가 답답함에 못 이겨 풀어둔 셔츠의 단추가 눈에 거슬린 것이다. 하녀장은 풀어진 셔츠의 단추를 채우며 말했다.

“도련님, 누누이 얘기드리지만 지금은 한참 바쁠 시기라 두 분이 언제 돌아오실지는 저도 모릅니다. 도련님은 그저 두 분이 바라는 대로 계속 그렇게 성장하시면 돼요.”

“하지만 거의 한 달간 늘 나 혼자 먹고 있잖아. 늘 저녁 늦게 돌아오시고….”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죠. 두 분이 그러시는 건 모두 도련님을 위해서니까요. 여기 이 집, 이 옷, 이 식사와 저희 모두, 다 두 분의 덕분으로 존재하는 것들입니다. 도련님이 그렇게 어리광 부린다고 해서 해결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란 얘기예요. 잘 아시겠죠?”

어린 유이토는 ‘그치만….’ 싶은 표정으로 하녀장을 바라보았으나, 그의 차갑게 쏘아붙이는 눈빛이 무서워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다시 오른손으로 음식을 집어넣었다. 가만 생각해보면 그의 말이 맞는 것 같았다. 부모님이 항상 바쁘신 이유는 모두 자신을 위한 것들이었고, 따라서 자신은 그분들의 말씀을 잘 들어, 올바르고 착한 어린이가 되어야 했다. 유이토는 집사장의 말들을 모두 똑똑히 새겨들으며, 자신의 어리숙함을 스스로 꾸짖었다. 목 가까이까지 채워진 셔츠의 단추가 그의 목을 조르는 듯 했다.

식사를 마친 유이토는 방 안에서 가만히 책을 읽고 있었다. 고요한 적막이 흐르는 가운데, 이를 깬 것은 바깥의 어떤 부산스러움이었다. 시간을 보니 20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부모님이 돌아오신 것이다. 유이토는 서둘러 책을 덮고 방 밖으로 뛰쳐나와 부모님의 곁으로 달려갔다. 그의 마음은 한시라도 빨리 그들의 품에 안겨 잔뜩 어리광을 부리고 싶었다. 하지만 자신의 모습을 바라본 그들의 표정에는 반가움보다는 못마땅함이 강했다.

“유이토, 옷도 정리하지 않고 뭐 하는 거니? 단추도 풀어헤치고, 셔츠도 한쪽이 바깥으로 나와 있잖니. 항상 깔끔한 태도를 유지하라고 그렇게 얘기했는데…. 게다가 오늘 식사 자리에서 또 왼손을 사용한 것도 모자라, 하녀장에게 어리광까지 부렸다며? 방으로 따라 올라오거라.”

강제적으로 방에 들어가게 된 유이토는 몇 번이고 회초리질을 당했다. 그의 종아리에는 빨간 줄 몇 개가 선명하게 그어져 점차 부어오르는 모습이 보였고, 어린 유이토의 눈에는 그렁그렁 맺힌 눈물들이 속수무책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소리를 내면 더 맞게 될 것이라는 두려움에 앙다문 입술 사이로 어린 신음이 터져 나왔다. 마지막 한 대를 맞음과 동시에, 그는 번쩍 눈이 떠졌다. 잠에서 깬 것이다.

잠에서 깬 유이토의 이마에는 땀방울이 맺혀 있었고, 숨은 심하게 거칠어져 있었다. 조금 전, 그가 본 것은 꿈이었다. 그것도 악몽. 하지만 그 일은 마냥 꿈이 아니었으며, 언젠가 어릴 적의 그가 보낸 하루의 일상을 내비치고 있었다.

유이토는 몸을 일으켜 침대에 걸터앉아 마음을 진정시키려 애썼다. 창밖은 아까와는 다른 풍경으로, 꿈속에서의 어린 자신이 본 그대로의 노을이 지고 있었다. 유이토는 머리를 한 번 쓸어넘기며 짧은 숨을 여러 번 내쉬고는, 옆에 놓인 핸드폰을 집어 들어 연락처에서 사람들의 이름을 쭉 훑어본 뒤,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무나…. 제발 아무나 받아….”

그의 말은 어떤 믿음이자 저주이기도 했다. 통화 너머에 몇 번의 신호음이 울린 뒤 상대방의 목소리가 들렸다. 유이토, 어쩐 일이야~? 하는 낯간지러운 목소리를 듣자 유이토는 무의식적으로 다시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응, 그냥 심심해서 연락했어. 지금 뭐 해? 하고 묻는 유이토의 목소리는 평소와 같은 상냥함이 여렸지만, 그의 눈빛은 저물어가는 해를 바라보며 떨리고 있었다. 좀처럼 진정되지 않는 마음을 억지로 잡으려 애써도, 마냥 쉽지만은 않았다.

유이토는 통화 상대와 저녁 약속을 잡으며, 서둘러 옷을 입고 거울 앞에서 정돈한 뒤, 뛰쳐나오듯 집을 빠져나왔다. 그 순간까지도 해는 서서히 저물고 있었다. 해가 저물면, 곧 달이 뜨게 될 것이라는 자명한 사실에도 불구하고, 그는 어쩐지 지는 해를 바라보고 있으면 알 수 없는 공허함에 사로잡혀 견딜 수가 없어졌다. 그는 빨라진 자신의 걸음걸이를 의식적으로 늦추기 시작했다. 숨을 크게 고른 뒤, 평소와 같은 모습을 유지하기 위해 마음을 진정시켰다. 아까와는 달리 사뭇 침착해진 그가 저무는 해의 방향으로 걷고 있었다. 그렇게도 천천히, 노을은 여전히 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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